후지시로 세이지 북촌스페이스서 10여점 전시
박서보·악셀 베르보르트·이타미 준 등 소장
“장작 가마로 색감·촉감 등 전통 미감 중시”
달항아리는 아름다운 이름만큼이나 많은 사랑을 받는 큰 백자 항아리다. 조선 후기(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에 빚어지다 사라진 조선 백자다. 중국·일본에는 없던 조선 고유의 것, 한국미를 상징하는 공예품으로 현재 7점은 국보와 보물로도 지정돼 있다.
높이와 몸통 지름이 40㎝를 넘는 크기에도 아무 장식이 없는 특이한 순백자다. 그래서 보는 각도나 기분, 빛, 날씨 등에 달라보인다. 색도 겨울 눈이나 모유같은 설백색·유백색, 푸른빛·회색빛이 감도는 청백색·회백색 등 다채롭다.
굽이 입보다 좁아 달처럼 떠있는 듯한 풍만함과 유려한 선의 형태미, 절제미도 돋보인다. 워낙 커 위아랫 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인 흔적도 지우지 않는 등 제작과정도 흥미롭다.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은 그동안 미술사가 최순우와 화가 김환기 등 많은 이들이 분석했다. 국제적으로도 영국 도예가 버나드 리치를 비롯해 무로 사이세이(작가), 이토 이쿠타로(전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장), 마이클 R 커닝햄(동양미술사학자), 알랭 드 보통(작가) 등 저명 인사들의 상찬이 유명하다. 달항아리는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줘 회화·사진·미디어 아트 등 다채롭게 변주되고 있다.
도예가 이용순(66)은 달항아리를 빚는다. 전통 달항아리의 아름다움, 조형미를 잘 구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작품전 ‘이용순 달항아리 전’이 후지시로 세이지 북촌스페이스(서울 계동길)에서 열리고 있다. 흙부터 물레질, 구워내기까지 온 정성을 쏟고, 도예가 의지를 넘어 가마 속 불이 도와줘 탄생한 달항아리 10여점이다.
‘도예가’보다 ‘도공’을 자처하는 그는 “전기·가스가마가 아니라 전통 방식의 소나무 장작불 가마에서 구워냈다”며 “작품 실패율이 높지만 불의 조화, 자연적 요변에 따른 전통적 미감을 중시해 장작가마를 고수한다”고 밝혔다. 자신이 추구하는 조형미, 아름다움을 얻으려는 수행자적 태도의 장인정신이다.
그는 달항아리의 독특한 미적 요소들 가운데 색감에 마음을 쓴다고 한다. 모든 것을 품어안아 주는 듯 넉넉하고 푸근한 형태미, 치장하지 않은 소박함 속에서 우러나는 당당함, 유려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선 모두 중요하지만 은은한 유백색이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화불도 환원불도 아닌 적절한 경계의 중성불에서 굽는다. 까다로워 숱한 경험을 동원해도 만족할만큼 이뤄지지 않는게 달항아리 작업이란다. 그는 “숨을 쉬는 항아리, 시각만이 아니라 만졌을 때의 촉감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용순은 독특한 이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고교를 졸업하고 골동 도자기를 수리·복원·재현하는 일로 도자세계에 들어섰다. 생업으로 시작했지만 도자의 매력, 특히 순백자·청화백자에 빠져들었다. 전국 도요지를 찾고 백자 파편을 구해 연구하며 1992년부터 본격 전통 백자 작업에 매달렸다.
작품이 도자 애호가들 사이에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2008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국내외 작품전으로 주목받았다. 도자 관심이 높은 일본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을 좋아했다. 벨기에의 세계적 디자이너이자 컬렉터, 갤러리로도 유명한 악셀 베르보르트는 일본에서 그의 달항아리를 보고 소장했고, 방한 때면 그를 찾는다.
소장자 중에는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 재일교포 건축가 고 이타미 준(유동룡) 등도 있다. 박 화백은 “형식이나 테크닉을 뛰어 넘는 경지가 느껴진다”며 그의 달항아리를 아끼고, 이타미 준은 생전에 여러 점 소장했다. 반기문 전 UN사무총장 등도 최근 전시장을 찾아 달항아리들을 감상했다.
전시장에는 달항아리와 함께 ‘그림자 그림’(카게에)의 거장인 후지시로 세이지의 작품도 함께 한다. 이용순의 순백의 달항아리와 평생 빛과 그림자를 다뤄온 후지시로의 작품이 묘하게 어우러진 것이다. 전시는 2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