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프리존]편완식 미술전문기자=그룹 '동방신기' 멤버 유노윤호가 영감의 원천으로 꼽았던 그림자 회화(카게에) 거장 후지시로 세이지. 올해 100세를 맞은 그의 작품 전시 ‘오사카 파노라마’전이 4월 7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설화를 바탕으로 한 ‘선녀와 나무꾼’ 작품 시리즈 14점과 6m가 넘는 초대형 작품을 비롯한 200여 점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재는 다름 아닌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들이다. 일본의 국민작가이자 세계적인 동화작가인 미야자와 겐지의 ‘첼로 켜는 고슈’, ‘은하철도의 밤’, ‘구스코부도리 전기’등을 후지시로의 감각으로 풀어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오사카, 교토, 나가사키 등 일본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도 출품됐다.
“나는 겐지동화와 만나 처음으로 카게에 작가로서 눈을 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겐지의 동화는 그때까지 읽어본 것과 좀 달랐다. 단순한 동화라기보다 기도(祈禱)의 동화라고 할까, 그 바탕에 무언가 깊은 기원과 기도가 담겨있다. 겐지 작품을 카게에로 만들 때는 특별한 감정이 든다. 한 번 읽어본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읽어보는 중에 마음 속에 강한 공감이 끓어오른다. 겐지는 ‘세계가 모두 행복해지지 않는 동안은 개인의 행복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가장 공감하는 부분이다. ”
결국 겐지의 동화가 ‘은하철도의 밤’에 의해 기도의 동화라고 불리게 됐다면 후지시로의 카게에는 ‘은하철도의 밤’에 의해 빛과 그림자의 기도라는 예술관을 확립하게 된 셈이다. 후지시로는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을 토대로 한 그림자극을 1000회 이상 상연할 정도로 그의 작품에 큰 영감을 받았다.
카게에는 먼저 밑그림을 그리고 색색의 셀로판지를 올려 면도칼로 자르면서 작품을 완성한다. 마지막으로 뒤에서 빛을 켜면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진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LED 디지털이미지를 넘어서고 있다.
후지시로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가 TV 등 대중매체와 매개되는 선봉에 서 있었다. NHK 개국 때 그의 극단 ‘모쿠바자’가 전속이 됐을 정도다. 1960년대 당대 최고의 밴드 비틀스가 최초 아시아 투어를 마친 부도칸에서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캐릭터 케로용이 등장하는 '케로용 쇼'가 열렸다. 또 당시 세계 최고의 전자회사인 소니(도쿄통신공업)의 광고에 그의 카게에가 사용됐을뿐 아니라 날씨 예보, 공익광고를 비롯한 상업광고에도 그의 작품이 등장했다. 고도성장기 일본 대중문화예술 발전의 중심에 후지시로 세이지가 있던 셈이다. 일본 팝아트 거장 무라카미 다카시도 그의 세례를 받은 세대다. 한국 팝아트의 원조 이동기 작가도 전시장을 찾아 후지시로를 직접 만났다.
전시장은 신비롭고 몽환적인 동화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든다. 일곱 난쟁이들,요정과 나무.선녀와 나무꾼 등이 빛과 그림자로 어우러져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게 만든다. 물수조와 거울이 아우라가 되주면서 환상적인 분위기가 무한히 확장된다.
“빛은 순수하고 투명하며 흠결이 없어 가장 순수한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다.”
그는 게이오대 재학시절 ‘팔레트 클럽’과 ‘아동문학연구회’ 동아리 활동을 했다. 그 시절 파리 유학에서 돌아온 화가 이노쿠마 겐이치로(猪熊弦一郎)와 와키타 가즈(脇田和), 고이소 료헤이(小磯良平) 등 젊은 화가들은 신제작협회라는 미술단체를 만들었다. 17, 18살의 후지시로는 이노쿠마와 와키다를 스승으로 삼았다. 이노쿠마에게서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감각과 참신한 색감을, 와키타에게서는 순수함과 부드러움을 배웠고 그의 화풍은 단번에 사실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 거듭났다.
전쟁이 끝난 후 후지시로는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전쟁 중에는 배급이 돼 쉽게 구할 수 있던 물감을 전후에는 아무것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영화배급사에 취직한 후 회사 일도 해가면서 쿠라시노테쵸우(暮しの手帖 삶의수첩)이라는 여성지에 카게에 연재를 시작했다. 그 때 지면으로 처음 실려 세상에 공개된 게 ‘완두콩다섯 알’이다.이땐 물자 부족으로 철사나 굴러다니는 물건을 이용해 카게에를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초토화가 된 도쿄에서 구할 수 있던 것은 골판지나 전구 따위가 전부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일본은 여전히 정전이 잦았다. 그는 카게에를 제작하며 어둠 속에서 자신만의 빛을 찾았다. 그는 십 대에 이미 일본의 독립미술협회전, 국화회전, 춘양회전, 신제작파전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지만, 카게에에만 전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