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적인 미술 전시회가 서울 한복판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올해 100세를 맞은 일본 ‘그림자 회화’의 창시자 후지시로 세이지(藤城 清治)의 ‘오사카 파노라마’전이다.
그림자 회화란 후지시로 세이지가 고안해낸 회화기법으로, 일본에선 ‘카게에(影繪)’라고 부른다. 밑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면도날로 섬세하게 자르고 색색의 셀로판지를 잘라 붙인 다음, 뒤에서 조명을 비춰 색감과 빛, 그림자로 표현하는 작품을 말한다.
후지시로 세이지는 밝은 빛과 어두운 빛의 밸런스, 오려 붙인 재료마다 다른 투과율과 질감까지 계산해 그림자 회화를 완성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후지시로는 10대 때부터 일본 독립미술협회전에서도 수상을 하는 등 일찍이 그림으로 촉망받는 작가였지만,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있었던 태평양 전쟁 이후 장르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는 물감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보다 접하기 쉬운 골판지와 전구, 빛과 그림자만 있으면 작업이 가능한 카게에를 시작했다. 그는 일본의 전통적인 카게에와 달리 인도네시아의 그림자극(인형극) 등에서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 카게에를 주로 작업했다.
종전 후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생활정보 잡지 ‘쿠라시노테쵸우: 삶의 수첩’의 카게에 일러스트를 작업하게 됐다. 연재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보여준 작품은 ‘완두콩 다섯 알’이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상업성과 예술성을 두루 갖춘 작품들을 발표하며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대표작 ‘울어버린 빨간 도깨비’는 그림자 연극으로 1000회 이상 상연하며 일본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일본방송협회 NHK가 1952년 개국 시험방송을 할 때 후지시로의 콘텐츠로 채워졌다. 그 이후 잡지나 공익광고, TV날씨예보까지 그의 작품들이 등장하며 일본의 대중문화예술과 성장을 함께 해왔다.
이번 전시는 제목에서처럼 오사카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도 등장한다. 오사카와 교토, 나가사키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일본 풍경을 섬세하고 유려한 선이 돋보이는 카게에와 스케치 작품으로 소개한다. 후지시로는 일본의 오래된 축제를 비롯해 대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로 사라지는 풍경들, 슬픔과 고통을 간직한 주변을 화폭에 많이 남기며 풍경이라는 소재를 통해 평화와 공생의 염원을 담아낸다.
‘눈 건너기’. 사진 제공=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손오공의 얼굴’. 사진 제공=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전시작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업들은 일본 아동 문학작가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의 동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다. 후시지로는 많은 인터뷰들을 통해 “미야자와의 동화와 만나 처음으로 카게에 작가로서 눈을 떴다고 해도 좋다”라고 할 정도로 그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미야자와의 작품 중 ‘은하철도 999’의 원작인 ‘은하철도의 밤’을 비롯해 첼로를 잘 켜지 못하는 첼로 연주가 고슈가 등장하는 ‘첼로 켜는 고슈’, 일본 아동문학사상 최고라는 평을 듣는 ‘구스코부도리 전기’ 등의 문학을 빛과 그림자가 조화를 이룬 그림으로 다시 구현됐다.
일본 문학을 소재로한 작품과 더불어 ‘서유기(西遊記)’와 중국 청나라 고전인 ‘요재지이(聊齋志異)’ 속 ‘목단기’ 이야기를 주제로 한 단색 카게에부터 환상적인 동화 속 세계를 구현한 듯한 색감의 작품도 함께 만나 볼 수있다.
‘코요테의 눈축제’. 사진 제공=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도 등장한다. 후지시로는 우리나라에서 그의 전시가 개최될 때 한국 전시만을 위해 작품을 새로 제작하는 등 한국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우리나라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소재로 한 카게에를 선보인다.
후지시로가 30대였던 1958년, 쿠라시노테쵸우의 연재를 위해 조선시대 설화를 듣고 선녀와 나무꾼을 소재로 5점을 제작했다. 그 후 일부 원화가 유실되었으나, 한국의 관람객들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65년 만에 12개 작품을 다시 만들어 시리즈 작품으로 최초 공개한다. 이외에도 6m가 넘는 초대형 작품과, 작가의 초기 흑백 작품 등 200여 점의 작품이 설치됐다.
100세에도 끊임없는 열정으로 하나의 장르를 이끌어온 후지시로 세이지의 전시는 4월 7일까지.